[디자이너 안상수의 학교 ‘파티’ 건물 설계한 건축가 김인철]
노출 콘크리트로 건물 틀만 준공… 가구·난방시설 등 내부는 학생 몫
“기존 교육의 틀 없앤 학교의 상징… 배움으로 이 건물 고쳐나가야죠”
파주출판단지 회동길 330. 새 건물이 준공(竣工)됐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갔다. 그런데 다 지어졌다는 건물이 꼭 폐허 같다. 문은 없고, 창이 있어야 할 곳엔 구멍만 숭숭 뚫렸다. 휑한 내부에 있는 거라곤 수도꼭지, 조명, 전원, 화장실뿐.
“준공이라면 공사가 끝난 거라 생각하죠? 우린 이제부터 망치질하고 고쳐갑니다. 앞으로 10년 동안.” 트레이드 마크인 점프 슈트(아래위가 붙은 작업복) 차림으로 그래픽디자이너 안상수(64)가 말했다. 한글 글꼴 ‘안상수체’를 만든 바로 그 안상수다. 이 요상한 건물은 그가 4년 전 대학·대학원 과정으로 만든 독립디자인학교 ‘파티(PaTI·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의 새 둥지. ‘파티’는 제도권 디자인 교육의 권위적인 수업 방식에서 벗어나 삶에 밀착된 현장 중심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파주 아시아출판문화정보센터, 안그라픽스 사옥 일부를 쓰다가 이번에 정식으로 어엿한 학교 건물을 짓게 됐다.
실험이 교시(校是)인 학교답게 배움을 담는 공간인 건물 또한 실험이다. 건물 얼개만 만들어놓고 살을 붙이는 건 학생 몫이다. 건축가 김인철(아르키움 대표)이 특별한 모험에 동행했다. 강남 교보타워 사거리의 ‘어반 하이브’, 파주 웅진씽크빅 본사 등을 설계한 건축가다.
새파란 젊음과의 협업은 건축 경력 40년을 훌쩍 넘긴 베테랑에게도 의미 있는 도전이다. “예전엔 짓는 것만 신경 썼는데 요즘엔 건물도 ‘잠재적 폐기물’이란 생각을 하게 돼요. 허무는 순간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되니까요. 오래가는 건물을 짓는 게 미래 세대를 위한 건축가의 책무라 봅니다.” 인식을 바꾸게 된 계기가 있었다. 딸 아홉과 살던 집을 부수고 다시 설계해 달라던 건축주가 있었다. 딸이 모두 시집가자 각자 쓰던 방 9개가 쓸모없어졌다고 했다. ‘집도 쓰레기가 될 수 있다’ 절감한 순간이었다. “이번 건물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용도가 바뀌는 ‘열린 건축’을 염두에 뒀습니다. 제 역할은 틀만 제공하는 것이지요.”
5차례 워크숍에서 학생들은 ‘자유롭고 편히 작업할 수 있는 트인 공간’을 원했다. 이런 요구 사항을 수렴해 얇은 콘크리트 판(가로 6m, 세로 6m, 높이 34㎝)을 건물 중심을 축으로 나선형으로 쌓아올린 구조로 5층짜리 건물(연면적 1719㎡·520평)을 설계했다. 한 층이 8개의 판으로 구성됐다. 내부엔 계단도 없고 문도 없어 층 구분이 모호하다. “기존 교육의 구태의연한 틀을 없앤 학교답게 공간의 경계를 문질러 없앤다”는 상징적 의미가 담긴 디자인이다.
발코니가 둘레길처럼 건물을 둘러싸면서 나선형으로 이어지고, 커다란 네모 구멍 130여개가 뚫린 노출 콘크리트 외피가 발코니를 감싼다. 내벽은 학생들이 자유롭게 헐 수 있도록 가건물에 쓰이는 샌드위치 패널로 했다. 내부 가구 제작, 발코니 장식 등 모든 게 학생들의 몫이다. 건물의 진화 과정에 장영철, 문훈, 김재관, 김정임, 김성진 등 젊은 건축가들이 함께할 계획이다.건물이 지향하는 중요 가치 중 하나가 ‘푸렁집’이다. 푸른색을 의미하는 순 우리말 ‘푸렁’과 ‘집’을 합친 낱말. ‘친환경 건물’의 ‘파티식’ 표현이다. 건물엔 냉난방 장치가 전혀 없다. 요즘 학생들은 곧 이사 갈 건물에 직접 만들어 넣을 ‘친환경 난로’ 아이디어를 한창 내고 있다. 새 학교 건물의 정식 이름은 ‘이상한 집’이다. 안상수는 “이상(異常)하고, 이상(理想)이 높고, ‘파티’가 존경하는 예술가인 시인 이상을 기억하는 집이란 세 가지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내년 이맘땐 학생들이 만든 장식이 건물 외벽에 덕지덕지 붙고, 난로 굴뚝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을지 몰라요. 반질반질한 건물만 있는 파주출판단지에 창의력으로 누빈 달동네 판잣집이 되는 게 우리 목표입니다.”
[출처]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1/11/2016011103669.html?outlink=faceboo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