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5.28. 파티.어버이.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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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명조장에서.파티.어버이.모임이.있었습니다..
파티.수레를.스승들.앞에서.끌고.
어버이들.뒤에서.미는.역할입니다..
자연스런.출발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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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님.중.한.분.역사학자.김정수.선생님은.
“PaTI의.비전, 동아시아사에서.찾다”라는.멋진.강의를.해주셨습니다..
무술인도.금융인도.춤꾼.교육자.편집자.
가업경영인.음악가.공무원.사업가도.계셨습니다..
한.분.한.분.모두.훌륭한.스승들이었지요..
진정.그분들은.파티를.믿고.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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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어버이들은.파티에.여러.바램과.좋은.제안들과..
영감과.용기를.주셨고..
또.앞으로.정기적으로.모여..
스스로.’파티어버이학교’를.꾸려나가기로.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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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5월.28일.또한.파티의.뜻깊은.날이.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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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파티.어버님.참.고맙습니다..
저희.스승들도.온힘껏.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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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ㄱ.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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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특별하고.맛난.음식을.마련해준.하미현(아부레이수나).님.참.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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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자료]
PaTI의 비전, 동아시아사에서 찾다.
한배곳 2 김라연 아버지, 김정수 (010-9194-8824)
1. 들어가면서
PaTI의 미래를 함께 지어가기를 고민하면서 앞날에 대한 지혜를 구하기 위한 첫 번째 어버이모임에서 날개 교장으로부터 역사 강의를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고민 끝에 제 나름의 결론은 ‘인류 지혜의 보물창고인 역사의 숨결을 느껴봄으로써 PaTI가 혁신적이고 창의적이며 미래지향적인 방향으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함’이라 생각했습니다.
역사는 박제되고 단절된 과거가 아니라, 역사에 뿌려진 씨앗, DNA가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역사 속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현재의 고민을 해결하고 미래의 비전을 세우는 데 지혜로운 조언을 해주고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용기를 심어주는 살아있는 보고이기 때문입니다.
2. 동아시아 역사 속에서 PaTI에 영감과 용기를 주는 세 가지 이야기
A. 과거 합격자로서 안정된 삶을 보장받았던 량치차오. 그는 당시 중국이 처한 현실에 괴로워하면서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개혁의 선구자가 되었다. → 입시 미술과 수능의 폐해, 당면한 교육계의 문제 그리고 PaTI의 교육 개혁
량치차오(양계초)의 삼십자술(三十自述) 중에서
나는 소년의 몸으로 과거에 합격하였고, 또한 시류를 좇아 훈고학과 사장학에 몰두하여 거의 모르는 것 없이 스스로 만족함에 차 있었다. 그러나 캉유웨이를 스승으로 모시게 된 후 선생께서는 바다의 사나운 파도의 울부짖음처럼 큰 소리로 수백 년 동안 아무런 소용도 없는 구학(舊學)을 붙들고 내려왔다고 극단적인 힐난을 하면서 모든 것을 청산해 버리라고 하였다. 냉수를 등허리에 퍼붓는가 하면 막대기로 머리를 얻어맞는 것 같았다. 하우 아침은 몸에 배었던 생각들을 깡그리 잊어버려 망망한 마음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놀랍고 기쁜가 하면 원망스럽고 의외롭기도 하고 그리하여 많은 의혹과 두려움 속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선생께서는 육상산과 왕양명의 심학, 그리고 아울러 서양학문의 개요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열심히 지금까지 해오던 구학(舊學)을 버리고 학해당을 자퇴하고 나와 격일간으로 남해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아 나갔던 것이다. 나의 생애에 있어서 세상에 학문이 있다는 알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모이향, “양계초”-
*량치차오(1873-1929) : 중국 청말 중화민국 초의 계몽 사상가이자 문학가로 번역, 신문·잡지의 발행, 정치학교의 개설 등 혁신운동을 했으며 변법자강운동에 힘쓰기도 했다. 계몽적인 잡지를 발간해 신사상을 소개하고 애국주의를 고취해 중국 개화에 공헌했다. 량치차오는 중국인들이 스스로를 높여 부르는 ‘중화’라는 용어를 최초오 사용한 인물이었다. 무술정변(1898) 당시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민족 문제를 놓고 손문 등의 혁명파와 치열한 논전을 전개하는 와중에 중화를 처음으로 거론하고 나섰다. “5대 중에서 가장 큰 아시아에 있고, 그중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다. 인구가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을 점하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다. 4000여 년 동안 역사가 중단되지 않은 자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중화다.”
현재 우리 교육계는 혁신의 한 복판에 있습니다. 수능 점수로만 학생을 일렬 종대로 줄세워 평가하던 수능 중심의 대학 입시가 수시 전형이 정착되면서 학생 활동의 누가 기록장인 학생부로 학생을 평가하여 수능 점수 없이도 대학 진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 PaTI가 선구자입니다. 개혁과 변화가 가장 더디다고 할 수 있는 미술 교육계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PaTI의 몸짓은 반드시 조만간에 결실을 맺으리라 확신합니다.
B. 기쁘고 놀랍고 즐거울 때도 울을 수 있는 울음터 PaTI, 호연지기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에서
(1780년) 정사(正使)와 한 가마를 타고 삼류하를 건너가 냉정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참 좋은 울음 터이구나. 한 번 울만 하구나!”했다. 그러자 정진사가 “이렇게 천지간의 커다란 시계를 만나서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씀이요?”하고 묻는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다만 七情(喜怒哀樂愛惡欲의 일곱가지 감정) 가운데서 슬플 때에만 울게 되는 줄 알지, 칠정 모두의 경우에 울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모양이요. 기쁨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증오가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망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오. 가슴속의 맺힌 것을 풀어 버리는 데는 울음소리보다 더 빠른 것이 없으니,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레나 벼락과 같은 것이라오. 지극한 감정이 우러나오는 때에는 그 감정이 우러나와 저절로 이치에 맞는 벗이니,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겠소? …… 갓난아이는 어머니의 태반 속에 웅크리고 있을 때 캄캄하고 막힌데다가 뒤얽히고 옹색하게 지내다가, 하루아침에 넑고 환한 곳에 튀어 나와, 손을 펴고 발을 펴게 되어, 그 마음이 시원하고 트일 터이니, 어찌 참된 소리를 발하여 지극한 정을 한바탕 쏟아내지 않겠소? 그러므로 우리는 의당히 저 갓난아이의 꾸밈없는 소리를 본받아서 저 비로봉 산마루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 만하고, 황해도 장연의 바닷가 금모래 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음 터로 삼을 만하지요. 이제 요동 벌판에 임하여 여기서부터 산해관까지 1200리 사이에 사방 어디도 한 점의 산도 없이 하늘가와 땅끝이 마치 아교풀로 붙이고 실로 꿰맨 듯이 맞닿아 있으며 고금에 걸쳐 비와 구름만 오고갈 뿐 다만 창창하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 볼 곳으로 삼을 만하오. -심경호,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배우미 학생을 선발하는 자리. 모든 과정을 끝내고 날개는 또 울었습니다. 학생들에게 자주 우는 모습을 보여주는 날개. 또 다른 기둥 스승들의 눈물. 이 눈물은 호수가, 바다가 되어 배우미들의 호연지기를 키워줄 것입니다.
C. 텍스트의 완성, 비주얼. 비주얼텔링의 선도자 PaTI
스기타 겐파쿠의 “해체신서”와 관련하여
해체신서가 출판되기 전 일본 의사 대부분은 중국 의서를 기본으로 일본식 처방을 보태 의료 행위를 하는 한방의(漢方醫)였다. 중국 고전 의서의 치료법은 우주론과 조화에 관한 이론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 의학은 초기부터 수술을 기본으로 하였다. 특히 17세기 유럽 의학은 신체 연구에 바탕을 두었고, 해부학은 필수였다. 그러나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신체에 상처를 내는 수술을 위험하다고 생각해 수술 자체를 아예 무시했다. 이런 이유에서 한방 의료에는 인체 해부를 하지 않아 한중일 삼국에서는 인체 해부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조선의 “의방유취”(1445)에 오장도가 그려져 있지만 형태가 매우 추상적이다. 그리고 인체 전부를 그린 허준의 “동의보감”(1610)에 있는 신형장부도(身形臟腑圖)는 실체 인체를 해부한 뒤 그린 것이 아니라 허준과 함께 편찬에 참여한 지식인들이 생각한 기본적 인체 구조를 기(氣)의 흐름이란 관점에서 추상화한 것이다.
1771년 초봄, 일본 에도의 고쓰가하라 형장(1651년부터 1868 메이지유신 직후 폐지될 때까지 약 210년간 20만 명 이상이 처형됨)에서 일본 근대 의학을 혁명적으로 바꾸고, 일본의 근대를 바꾸는 하나의 단초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스기타 겐파쿠를 비롯해 에도에서 근무하는 각 번의 시의(다이묘 등을 진료하는 의사)들이 이 형장에서 인체 해부를 처음 참관하고 모종의 결의를 한 것이다. 이날 인체 내부를 처음 본 겐파쿠를 포함한 의사 셋은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옛 중국 의서에 실린 인체도는 실제와 다른 반면, 자신들이 갖고 간 네덜란드 인체 해부서에 실린 인체도는 실제 인체와 정확히 같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의사라면서 인체 구조도 제대로 모른 채 주군님을 모시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고 반성했다. 그리고 네덜란드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결의한다. 하지만 그 결의는 무모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당시 겐파쿠는 알파벳조차 몰랐고, 나머지 두 사람의 네덜란드어 실력도 극히 초보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번역 도구라고는 사전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잡한 필사본 네덜란드어-일본어 단어장 한 권 정도였다. 따라서 이들이 네덜란드어 의학 전문 서적을 해독하고, 번역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해냈다. 약 3년에 걸친 천신만고 끝에 “해체신서”란 번역서를 출판한 것이다. 이렇게 세상에 나온 “해체신서”는 일본 역사상 첫 서양 의학서 번역이라는 불후의 업적이자 일본 근대 의학의 여명을 밝힌 쾌거라는 평가를 받는다
“해체신서” 출간은 이후 네덜란드(화란)를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을 뜻하는 란가쿠(난학)가 일본에 융성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해체신서” 출간 이후 난학은 100년 가까이 일본 근대 의학뿐 아니라 과학과 예술, 나아가 교육, 사고방식, 관습 등 일본인과 일본 사회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이치며 퍼져 나갔다. 난학은 근대 일본을 서서히 변화시켜 나가는 촉매 역할을 하면서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이 서양식 근대화를 이루는 하나의 토양이 된 것이다.
-이종각,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스기타 겐파쿠(1733-1817) : 와카사 국 오바마 번의 번의(藩醫)였던 스기타 호센의 3남으로 에도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난산이었던 탓에 그의 모친은 사망하였다. 17살 무렵부터 고학파(古學派)인 미야세 류몬을 통해 유학을 배웠고, 막부의 의관이었던 니시 겐테쓰에게 의학을 배웠다. 겐파쿠는 일본에서 ‘난학의 선구자’, ‘일본 근대 의학의 개척자’로 칭송되면서 각급 학교 교과서에서도 다뤄지고 있다. 일본 사람 중에서 그의 이름과 “해체신서”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고 가히 위인 반열에 오른 인물이다.
3. PaTI 인문학 총서(고전 읽기 그리고 상상력 극대화하기) 발간 건의
현재 우리 교육계는 혁신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문학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교육계의 혁신과 인문학 증진의 방법은 모호하고 실체는 희미합니다. 이를 위해 PaTI에 다음 사항을 건의합니다.
수시 입학이 정착되면서 청소년들은 독서의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시민들의 독서의 중요성 역시 강조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PaTI가 “우리 고전 강독 후 문제적 장면 삽화 그리기”의 시민 강좌를 유료로 개최하는 방안을 건의합니다. 주말에 시민들을 회원으로 모으고 독서할 책을 깊이 연구한 강사의 지도 아래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중요한 단락을 한 꼭지씩 돌아가며 읽게 하고, 독서 후 느낌을 발표하게 합니다. 그리고 책 한권 독서가 끝나면 독서 내용 중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을 삽화로 그리게 한 후 전시회를 개최합니다. 물론 PaTI의 배우미들은 무료로 강의를 제공하지만 졸업 때까지 적어도 20권의 우리 고전을 읽고 문제적 장면 삽화 그리기 20장을 완성해야 졸업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필요합니다. 그런 노력이 모이면 강사의 고전 소개, 고전 원전, 문제적 장면 삽화가 어우러진 가 발간될 수 있습니다.